솔: 영화 초반에 한나와 마이클이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무슨 내용을 말하려는 영화일까 전혀 감을 못 잡았었는데…
훈: 나도.
솔: 감을 잡았을 때는 중간쯤이었던 것 같아. 그들이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나는 장면부터. 그 전 부분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뒷 내용을 보고 나면 아,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욱: 저는 길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그 둘의 관계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면서 동시에 가장 외로운 장면이잖아요.
림: 맞아요, 너무 슬퍼요.
욱: 간극이 가장 크고, 슬프고… 어쩌면 그게 가장 클라이막스 같기도 해요. 영화를 1,2부로 나눈다면 앞부분에서 가장 절정인 장면.
훈: 시간이 흐르고 법대생이 된 마이클이 법정에서 한나를 만나는 순간이 2부의 시작 같은 느낌이고요.
림: 민감할 수 있는 주제잖아요, 영화에서 하는 말이. 어렵고 민감한 주제를 둘의 이야기에 담아내면서 글을 읽지 못하는 여자와 글을 읽을 줄 아는 남자가 사랑을 하면서 밝혀지는 각자의 과거 이야기를 문학적인 요소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어요. 보면서 내내 감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이 이야기가 실화는 아니겠지만…?
솔: 실화는 아니고 소설 원작이라고 들었어요.
림: 그렇구나, 영화를 보면서 진짜로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솔: 영화 중간에 한나랑 마이클이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만난 식당 주인이 마이클에게 엄마랑 온 거냐는 질문을 했을 때, 순간 둘의 나이 차이를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체감하기로는 열 살 정도 같은데.
림: 거기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게 괜찮은 건가, 미성년자인데…?
훈: 영화에서 보면 열다섯 살과 서른여섯 살이잖아요. 스물한 살 차이가 나는데.
솔: 나중에 검색해 보고 나서 그게 세대 차이를 나타낸다는 걸 알았어요.
욱: 전후 세대잖아요. 전쟁을 모르는 사람과 전쟁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고요.
림: 세대로 바라본다면 책 읽어주는 장면이 더 슬프게 와닿는 게, 젊은 세대로부터 전쟁을 겪은 세대가 배워나가는 이야기 같기도 해요. 쇠퇴해 가는 세대가 전쟁을 모르는 세대로부터 배우는 장면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배워나가는 게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그 장면이 더 슬프게 와닿기도 했어요.
욱: 그리고 마이클의 대학 친구가 어쩌면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니까 더 격하게 비판하는 것 같았어요. 그 상황에 있지 않았고 끝난 뒤에 태어났으니까요. 그렇지만 한나는 전쟁 속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살기도 했잖아요. 그렇게 보면 ‘나는 내 인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나를 부역자라고 욕한다’ 라고 볼 수도 있고. 아마 그 부분에서 우리가 한나를 쉽게 비판할 수는 있어도 ‘너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라는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 않나 하는 딜레마가 생기는 것 같아요.
림: 사랑과 글이 한나의 선택에 크게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슬펐거든요. 테이프로 다 녹음을 해서 보내주잖아요. 그걸 받은 한나가 어떤 마음이었을지가 감히 상상이 안 되지만, 그래도 그 장면 이후에 그런 선택을 한 게 납득이 된다고 할까요. 너무 큰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자신이 법정에 서고 재판을 겪으면서 자신의 일을 담담히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얼마나 잘못을 했는지 깨닫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것 같아요.
욱: 아마 그게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관심을 갖지 않고 타자라고 생각했던 대상에 대해서는 죄책감 없이 행동하지만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타인에게 상실을 겪게 한 일이었는지 알게 되잖아요. 내 안의 세계에서 변화를 겪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한나가 나쁜 짓을 했다고 알고는 있지만 잘못했으니 벌을 받는 것일 뿐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고요.
훈: 한나는 재판 당시 자신의 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 모르잖아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했을 뿐이라고 말하고요. 한나의 죄가 있다면 모르는 것, 무지한 것이 죄인 거죠. 그런데 그게 그 무지가 개인의 잘못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개인의 무지가 역사적 맥락과 사회 속에서 구조적인 문제처럼 느껴졌어요.
솔: 그런 의미에서 그 대사가 너무 좋았거든요. 한나가 법정 앞에서 자신에 대해 얘기를 할 때 ‘우리는 경비원이었어요. 경비원은 수감자를 감시하는 사람이에요. 경비원은 수감자가 도망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라고 말하는데, 맥락을 다 떠나 경비원이란 역할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잖아요. 그 순간에 내가 설득이 된 거예요. 맥락과 배경으로 말도 안되는 말인 걸 알지만 정말 당당히 말하는 한나의 모습을 보고 무지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무서운지 전달이 됐어요.
욱: 악의 평범성이라거나, 기계적 중립은 방관이라는 말이 생각나요. 그런 의미에서 한나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점은 있고요. 저는 한나가 단죄를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자존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문맹임을 들키고 싶지 않아하는. 다른 사람들이 법정에서 다 위증을 하잖아요. 한나가 다 시킨 일이고 그가 우두머리라고. 자신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자리에서 한나가 ‘나는 글을 모른다’라는 말 한 마디만 했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한나는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죄의식보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부끄러움이 더 커서 평생 감옥에 갇히는 걸 택했을지도 모르고요. 나중에 글을 알고 난 뒤에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알고 난 뒤에 한나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것을 밝히기 싫은 자존심만 알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죄의식을 느꼈을 것 같아요.
훈: 저는 그 부분을 조금 다르게 보기도 했어요. 한나가 글을 모르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서 죄를 혼자 뒤집어쓰면서까지 문맹인 사실을 숨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제가 돌아본 한나의 대사 하나하나와 행동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의지적이고 결연하게 느껴져요. 특히 마지막에 마이클과 글을 깨우친 한나가 교도소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한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여전히 그것은 지난 일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거라고만 이야기하죠. 저는 어쩌면 한나가 끝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의 틀에 대한 저항, 투항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도덕, 법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서 합의된 체계이자 약속이잖아요. 그 체계는 그 시대 구성원들의 도덕 판단, 가치 판단으로 만들어지고요. 한나는 그런 판단으로부터 굉장히 벗어나 있는 인물이에요. 영화 초반에서도 마이클에게 어떤 행동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한나는 재판장에서도 마지막까지도 그 체계에 속하지 않기를, 길들여지지 않기를 택한 걸 지도 모르죠. 그래서 저는 한나가 문맹인 것을 숨긴 것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것도, 자살을 하게 되는 것도 한나 자신으로 살기 위한 의지가 담긴 행동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렇다고 한나가 죄의식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법 체계 바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속죄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