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 그런데 감상자나 창작자 입장에서 그런 장면 자체를 아예 없애야 된다는 아니잖아요. 영화를 위해 필요한 장면도 있고, 그 장면이 주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있잖아요. 우리가 불편하지만 느끼게 되는. 저는 어느 정도까지 필요하고, 어느 정도까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그런 논의가 요즘 많이 다뤄지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고 생각해요.
훈: 창작하는 사람의 윤리가 진짜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어디까지인지가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이제 문제가 될 걸 알면서도 흥행을 위해서 쓰는 게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한국에서 잘 나가는 콘텐츠들이 그러고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오징어 게임도 그렇고 지금 우리 학교는도 그렇고.
욱: <지금 우리 학교는>은 만화 원작에 없는 장면도 넣어서 자극적으로 만들었잖아요.
림: 아 진짜요? 저 진짜 옛날에 그 초반에 네이버 베도 때 봤거든요. ‘베도’ 진짜 옛날같다.
훈: 베도?
림: 베스트 도전이라고(훈이 크게 웃는다.). 메인에 소개되는 웹툰이 되기 전에 준비하는 인기 많은 웹툰을 볼 수 있는 데서 봤는데 그것도 보다가 그만뒀거든요.
솔: 자꾸 부풀리고 재생산하는 게 맘에 안 들어. 그거에 대해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그 장면을 쓸 거면 어떤 책임을 가지는 태도나 자신의 창작 관점, 의식, 메세지를 담아서 그 장면을 넣으면 그 장면이 아무리 잔인해도 의도가 있나보다 느낌이 드는데. 그게 없이 무비판적으로 넣은 장면이라는 게 보여서 괘씸한 거지.
훈: 맞아. 제일 책임감 없는 태도가 그렇게 보여주고 ‘우리 현실이 이렇다’ 말하는 거.
림: 맞아 맞아.
욱: 영화 아니라도 많잖아요. 예전에 걸그룹 스텔라 뮤직비디오 이런 거.
훈: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콘텐츠에서 되게 충격적인 데 필요하다고 느꼈던 장면들도 있던 것 같아요.
욱: 그런 게 주는 쾌감도 있고. 저는 <존 윅> 시리즈 좋아하거든요. 그냥 정말 연필 하나로 세 명을 죽였다 말하는 킬러물.
림: 장전 한 번 할 때마다 탄환 수 맞춘다면서요 그 영화는.
욱: 맞아요. 저는 그런 장르물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마냥 나쁘게 보기보다는 각자가 추구하는 쾌감과 미학이 있는 거니까. 다만 그 세계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등장시키는 방식과 다루는 태도 같은 걸 더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걸 비판하고 있는 과정에서도 비판하게만 되지 않나 생각해 보면 조금 슬퍼요 솔직히. 좀비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 ‘쓸데없이 가학적인 장면이 나오면 어쩌지’ 하면서도 보게 되잖아요.
림: 맞아요. 또 이렇게 나오면 어떡하지 하면서.
욱: 그러면서도 보게 되고, 그러다 실망하고 상처받고. 대부분의 감상자들이 그렇게 보잖아요, 요즘 나오는 콘텐츠들을.
훈: 제가 <지금 우리 학교는>을 다 봤는데 재밌어서 죄책감이 들기도 했어요.
욱: 진짜. 그런 의미에서 무해함을 강조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갈수록 모든 콘텐츠에서 대놓고 무해함을 어필하잖아요 전략으로. 그런데 사실 그건 전략이 아니고 기본이잖아요. 우리 ‘무해한 커피’, ‘무해한 디저트'라고 안 하잖아요. (림 웃는다.) 그만큼 사회에서 유해한 것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저는 그걸 전략으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무균실에서 표백한 컨텐츠를 보는 것도 저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도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면 저항이겠지만, 그러면서 자신 스스로 영역을 축소시키게 되잖아요.
림: 과도한 검열 같은 거네요.
욱: 그런 셈이죠. 마치 우리는 ‘윤리적으로 만들었어’라고 어필하는 것 같은. 또 그런 일도 있었어요. 어떤 남성 시인의 시집이 나왔는데, ‘이 시집에 나오는 표현들은 혐오 발언 이런 것들은 다른 여성 편집자 분의 의견을 받고 수정했습니다’라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시인 본인의 인터뷰인지 기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게 좋은 태도이면서 동시에 그걸 전략으로 어필해야 되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림: 언급하면서 멋을 잃었어.
욱: 어쩌면 그 멋을 없애가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말하는 것도 좀 웃기다고 생각해요. 마치 우리 콘텐츠는 무해하지 않아요라고 계속 어필해야 하는 듯한. 어쩌면 나도 컨텐츠를 감상하기보다는 자꾸 유해한 부분만 찾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요. 영훈씨가 <지금 우리 학교는>을 불편하지만 재밌어서 봤다고 하는 것도 충분히, 당연히 이해가 되는 상황인데 ‘왜 봤냐, 소비했냐’ 하는 식의 말이 있잖아요. 지우학 불매한다는 해시태그 이런 거 있잖아요. 근데 세상에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들에 그런 면이 있지 않나 싶어요. 아이돌 문화도 어떻게 보면 미성년자들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하고 그들의 젊은 외관만 마음껏 소비하는 비윤리적인 방식인 거고요. 저는 미식축구를 좋아하는데 그 선수들의 격렬한 플레이 뒤에는 뇌진탕 후유증으로 오래 고생하는 비극이 따라오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정말 무해한 것이 있다고?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런 걸 찾게 되는 힘든 세상인 건 맞고, 수요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스스로의 무해함을 어필하는 창작자의 태도는 과연 좋은 것인가? 최근에 되게 많이 봐서 말하고 싶었어요.
솔: 그런 일도 있었구나.
욱: 저는 ‘무해함’이라는 낱말이 아름답지만 또 공허하다고 생각했어요. 거친 비유지만, 눈이 오는 걸 바라보며 걷다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다칠 수도 있는 건데. 그러면 그 눈은 아름답게 보아서는 안 되는 걸까. 도처에 깔려 있는 유해함이 너무 많은데 그걸 정말 다 제거할 수 있다고? 드라마에서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그런 서사. 어쩌면 그런 게 ASMR, 브이로그 같다고 생각해요. 다들 현실에서 그러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 햇빛 가득한 늦은 아침 화이트톤 배경에 아보카도 샐러드 먹는 컨텐츠를 소비하잖아요. 알면서 보잖아요. 무해한 걸 찾고 싶으니까.
림: 근데 뭔가 그런 무해한 사람도 콘텐츠도 없겠지만, 그걸 찾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가 되어가지고 씁쓸해요.
욱: 맞아요. 마음은 이해가 돼요. 다만 창작자들은 그걸 어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유해함과 무해함이라는 기준으로 컨텐츠를 바라보는 것이 감상의 지점을 협소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요.
훈: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것 같아요.
욱: 그렇죠, 그런. 그런데 요즘 세상이 다 그렇잖아요. 내가 타인을 위해서 삶의 많은 공간을 열어 두고 살지 않잖아요.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감상자로서, 창작자로서 존재할 때 협소하고 납작한 길을 택하는 게 좋은 것 같진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길티 플레져 같은 게 현실에는 왜 없겠어요. 진짜 별로고, 영 별로인 인간인데 오래된 친구여서 만나게 되기도 하고, 부모나 가족 역시 마찬가지고요. 누군가는 그건 단절하고 살 수 있지만 누군가는 또 그걸 감수하고 사는 거고요. 물론 인간관계나 가족 같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지점과 콘텐츠 하나를 바라보는 일을 같이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창작자는 쉽게 유해함/무해함을 먼저 말하며 그것만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