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언제나 책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내가 쉽게 꺼낼 수 있는, 책꽂이 아래에서 두 번째 칸을 채운 색색의 동화책들. 생각해보면 종류도 한국, 미국, 독일 등 다양했는데, 유독 '바보 이반'이란 동화책이 기억에 남아있다. 어쩐지 눈의 초점이 안 맞는 이반이 웃으면서 정면을 응시하는 표지였는데 그 분위기가 조금 무서워서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 같다. 책장엔 '바보 이반'처럼 독특한 일러스트부터 동화책 다운 따뜻한 일러스트까지 다양한 책들이 있었고, 그날 기분에 따라 하나를 꺼내 가면 엄마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책을 읽어주셨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아서 매일매일 책을 골랐던 것 같다. 엄마는 그런 나를 무척 기특해하며 꽉 안아 주셨고 나는 그때마다 책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럴까 엄마는 지금도 내가 책을 읽으면 나를 뿌듯한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본다. 얼마 전에는 거실에서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있었더니, 어느새 엄마가 다가와서는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어린 나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는지 얘기해주며 엄청 생색을 내셨다. "다 엄마 덕이야." 하곤 흠흠, 웃는 엄마를 보며 나도 같이 흠흠, 하고 웃었다. 그래 맞아, 다 엄마 덕이지.
앞니의 빈자리를 혀로 눌러보던 시절, 매일 밤 찾아오는 다른 세계 속 친구들을 좋아했다. 콩 나무를 키우는 잭이나 옥수수 빵을 굽는 암탉의 이야기는 어린 나를 설레게 했고, 매일 밤 꿈속에 다양한 친구들이 나왔던 것 같다. 엄마가 한참 동화책을 읽다가 조용해져서 나를 보면 내가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로 잠들어있었다고 한다. 아마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와 포근한 동화책 속 세상이 그때의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가장 안락하고 따뜻한 순간이지 않았을까. 그 따뜻하고 안락한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엄마는 내가 엄마를 좋아해서,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출력값처럼 엄마가 '책 읽어주기'를 해서 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고 믿으시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그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던 몽글한 시간이 '엄마의 교육법'에 갇히는 것 같아 조금은 슬프다. 음, 여기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 예상이 맞다. MBTI에서 엄마는 T형이고 나는 F형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또 '네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래, 뉴스나 좀 봐.' 하신다. 이게 또 틀린 말은 아니라서 서러움을 삼키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속으로 툴툴거린다. 엄만 날 너무 몰라.
그 여섯 살짜리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내 주변에는 여전히 책이 많다. 사실 내 방에만 많다. 크고 나서야 부모님이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가끔 벽 한쪽을 채웠던 그 많은 동화책을 떠올리면 새삼스레 마음이 울렁거린다. 딸에게 읽어주기 위해 앙증맞은 동화책을 잔뜩 사 모으던 지금보다 젊은 날의 두 분.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두 분은 나보다 조금 더 언니, 오빠일 뿐인데 어떻게 아이를 키우셨는지. 나는 못해!라고 생각하고 만다. 비록 지금은 딸 방에 책장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시는 두 분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어주셨다. 그때 동화책을 꽂아두었던 책장은 책 말고 다른 것들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망가져서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책상 위에 둘 수 있는 적당히 큰 책꽂이를 들였다. 새 책장을 사고 싶었지만 책장을 둘 자리가 나지 않아 선택한 나름의 최선이었다. 그래도 두 단짜리 책꽂이 안에는 온전히 내가 고른 책들이 있다. 소설과 시집과 에세이와 몇 권의 인문학 책. 그리고 이제 책들은 책꽂이를 벗어나 책상의 1/3까지 자리를 넓혔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수많은 세상이 내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내가 더 섬세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면 그 세상들을 좀 더 빠르게 머릿속에 넣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책들을 그저 자주 꺼내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소화하지 못한 세상을 오래 두고 몇 번이고 읽으면 언젠간 완전히 이해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을 가지고서.
언젠가 독립해서 온전한 내 공간을 가지게 된다면 크고 멋진 책장을 사고 싶다.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그래도. <오늘의 집>이나 <이케아>에서 자주 보이는 희고 차가운 느낌의 철제 책장이 아니라, 나뭇결이 살아있는 목제 책장을 사서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을 내가 자주 읽는 순서대로 꽂을 것이다. 그러면 책장이 아마 1/3 정도 찰 텐데, 남은 공간은 살아가면서 천천히 채우면 된다. 황인찬 시인의 시집은 가장 꺼내기 쉬운 4번째 칸에 넣을 거고, 내가 사랑하는 정세랑 작가와 이번에 읽은 김초엽 작가의 소설도 4번째 칸에 둘 것이다. 바닥과 가까운 첫 번째 칸에는 내가 좋아했던 동화책과 만화책을 넣을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채워질 책들을 위해 3번째 칸은 비워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책장만 보고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내가 나를 잃어버렸을 때, 그 책장 앞으로 가서 첫 번째 칸부터 마지막 칸까지 천천히 둘러보는 나를 떠올린다. 수십 년의 삶 동안 나는 이런 책을 읽었고, 이 책을 좋아했고, 읽고 싶은 책이 아직 많구나. 분명 비워지고 다시 채워질 그 책장 앞에서 나는 삶에 젖어 잠시 길을 잃었던 '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