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 이번엔 작가가 가져야 하는 주변에 대한 태도에 관해 이야기 해봐요. 어쩌면 이게 가장 어려운 질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림: 한 개인과, 한 작가는 다르니까 작가가 글을 쓰면서도 조심해야 하는 지점, 창작자의 윤리를 생각해야 하는 순간이 많은 것 같아요. 캐릭터를 다룰 때도 의미 없이 소비하면서 다루지 않아야 하는 건데, 하물며 그 대상이 주변의 인물이라면 더더욱 고민을 많이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욱: 제가 이 질문을 했는데, 사실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것 같잖아요. 그럼에도 우리가 작품을 읽고 답을 얻을 수 있다면 김병운 작가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의 마지막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소설의 마지막에 작가인 화자가 계속 고민할 때, 다른 것들은 잊어 가면서도 계속 써 달라는 말은 기억하고 있잖아요. 저는 그럼에도 작가가 써야 한다고 믿으며 스스로의 물음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은 결국 계속 쓰는 것과 쓰여진 이야기를 쉽게 매도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작가는 자기 작품을 읽는 독자이기도 하잖아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혹시 너무 문제적일까봐 먼저 겁먹고 쓰지 않는 것은 작가로서 좋은 태도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쓰는 과정에서 더 문제적으로, 실험적으로 쓰려 노력하다가 그 과정에서 윤리에 매몰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면 슬플 것 같긴 해요. 한쪽에서는 말도 안 되는 작품들이 계속 나오잖아요. 시대가 지났는데도 오늘날의 감수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옛날의 정서만을 답습하는 것도 너무 많고요. ‘조폭깡패영화’로 대변되는 어떤 것들.
훈: 여전히 시장에서 수요가 있고요.
욱: 네, 그렇죠. 그리고 그런 걸 꾸준히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어이없게도) 어느새 거장이 되어 있기도 하잖아요. 다른 이야기이지만 아까 유림씨랑 잠깐 이야기했는데, 제가 디자인과를 다녔을 때 보면 문제의식이 가득하고 재미있는 작업을 하던 분들도 어느 순간 직업을 갖고 일을 하게 되면서 개인의 생각을 작업으로 표현하는 순간이 줄어들더라고요. 물론 학생 신분이 아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개인 작업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의 문제에 매몰되어 다른 생각을 더 할 수 없는 환경이 감상자로서, 업계의 구성원으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어쩌면 저 역시 독자로서, <미애>에 나오는 아파트 독서 모임의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일 없이 윤리적 염결성만 집착해 작품을 너무 쉽게 평가해버리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옳다, 그르다라는 잣대만으로요. 그래서 아까 유림씨가 <골드러시>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캥거루가 등장하는 장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부분에 공감을 했어요.
림: 감상할 때도, 창작할 때도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인지하는 상태로 써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고요. 읽는 사람이 작가가 계획한 대로 읽지만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캥거루가 나오는 장면도 단순히 캥거루가 죽었다, 라는 사실만이 아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고요. 그래야 그 열린 지점에서 여기서는 이게 좋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겠고, 다른 식으로 연결될 수도 있구나, 하는 지점을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서요. 너무 확신하고 확언하는 태도만 아니면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하나 예전과 달라진 것 같은 지점은,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의 작가처럼 소설이 출간된 이후에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의 화자인 작가도 중쇄를 위해 작품을 다시 검토하다 자신이 미처 몰랐던 부분을 발견하잖아요. 그러면 또 앞으로 작가가 인터뷰나 다른 매체를 통해 자신의 예전 잘못과 실수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그걸 통해 더 나아진 작품을 쓰겠다는 가능성으로도 나아갈 수 있고요. 그렇게 나아갈 수 있다는 지점을 보여 주면 선순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 같고요. 나는 고착화된 사람이 아니고, 실수를 하면 반성하고 더 나아지려고 하고, 더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을. 그렇습니다.
훈: 공감이 많이 가요.
솔: 저는 생략.(웃음) 앞에서 다 말해 주어서.
욱: 혹시 영훈씨는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나요?
훈: 저는 여러분 이야기를 듣고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라는 책이 생각났어요. 작가가 그 책에서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요. (중략)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예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게 너무 좋았거든요. 내가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어쩌면.
림: 기만인 것 같기도 해요.
훈: 응응. 계속해서 그저 보려는 것? 그러려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그걸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가 글 쓰는 나 스스로에게 젖어 있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글 쓰는 저를 좋아하는 것 같고요. 대욱형이 작가가 쓰는 태도와 마음에 대해 얘기했던 것처럼 저에게도 좋게 느껴지는 지점은 결국 삶을 그저 보려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쓰려는 태도 같아요. 글쓰는 저는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하거든요. 저는 제가 별로인 부분도 정말 많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려는 내가 좋아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쓰는 마음, 그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욱: 혹시 그건 어떻게 생각해요. 만약 내 주변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가져온다거나 주변 지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나 하는 것들. 사실 예전에는 그렇게 많이 생각하진 않았고 조금 바꿔서 쓰면 된다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또 그렇지가 않잖아요. 그래서 이 지점에 대해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듣고 싶었어요.
림: 먼저 허락을 구해볼 것 같아요. 허락을 구해 보고 안 된다고 하면 안 쓰고, 된다고 하면 쓰는데 그 친구에게 보여주어 확인을 받을 거고요. 제가 쓴 글을 보고 그 친구가 만약 너무 자세하게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준다면 그 내용까지 반영해서요.
솔: 뭔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 같아요. 유림이 이야기를 듣는데 모범 답안을 듣는 기분이었어.
림: 근데 그렇게 안 하면 다르게 할 수 있나?
훈: 저는 겁쟁이라서 그냥 시도를 안 할 것 같아요. (다같이 웃음) 왜냐면 이게 아니더라도 다른 쓸 이야기가 많으니 다른 이야기를 선택할 것 같아요.
욱: 만약 정말 내가 탐이 나고, 쓰고 싶은 상황일 수도 있잖아요.
림: 포기할 수 없는 주제다.
훈: 그러면… (유림의) 모범 답안을 따라. (다들 웃음)
솔: 나는 아무래도 현실에 더 밀착한 이야기를 쓰고 싶으니까 이런 고민을 더 많이 할 때가 있단 말이야. 물론 지금은 쓰는 것보다 생각을 더 많이 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며칠 전에도 고민했던 주제이기도 해. 내가 만약 어떤 이야기가 쓰고 싶은데, 전에 내 친구가 이야기해 준 것을 꼭 써보고 싶고, 그 이야기는 소설의 메인이 아니라 일부분에 등장하는 정도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고민을 했어. 그러다 조금 변주해서 써 보자고 생각했는데, 나오는 인물은 같지만 그때 나오는 구체적인 정황을 조금 바꿔서 쓴다면 이건 괜찮은 일일까 하는 고민을 또 했어.
림: 어디까지 바꾸면 괜찮은 걸까.
솔: 맞아, 맞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욱: 유림씨 말을 듣고 은솔씨가 모범답안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말에 완전히 공감하면서 동시에 유림씨가 아직 그런 상황을 안 겪어 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웃음) 만약 유림씨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만났다면 저는 은솔씨가 말한 것처럼 바꿔서 쓰는 것이 작가의 예의라고 생각하거든요.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아예 안 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 바꿔야 하는지가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저는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의 이야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메인 서사의 축으로 추동시키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삶, 실제 이야기를 나의 서사를 위해 작동시키는 것은. 만약 정말 써야 한다면 내가 있었던 이야기로 각색하거나 나의 관점을 넣어서 시점을 바꾸는 것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사람이 한 명 추가되면 그 사람의 이야기와 관점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맞게 달라지는 지점이 있으니 그때는 작가가 써도 될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특정하거나 배격하는 방식은 안 되겠지만. 그런 말 있잖아요. 음대 다니는 사람 만나지 말아라, 너 가지고 노래 만들고. 문창과 다니는 사람 만나지 말아라, 너 가지고 시 쓰고.
림: 소설에 너 나오고.
욱: 이게 농담이지만, 어쩌면 작가가 가져야 하는 태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예시 같기도 해서 공감도 가고, 그래서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또 만약 누가 내 이야기를 쓴다면 내 기분은 어떨지 하는 생각도 하고요.
림: 사실 저는, 제 주변 사람이 제가 있었던 일을 가지고 소설을 쓴다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그 내용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그리고 나를 소설에 등장시켰는데 그 친구만이 나는 나의 개인적인 사연이나 가족사 같은 걸 썼다면 그땐 화가 날 것 같은데, 일상에서 나를 보고 그 친구가 느꼈던 걸 쓴다면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아요.
욱: 아, 그래서 유림씨가 쓰고 나서 보여준다고 한 게 그렇군요. 본인이 궁금하지만 어느 정도인지까지 봐야 하니까.
림: 네, 맞아요.
솔: 생각해보면 영훈의 메일링 서비스 <이영훈의 나이테>에 제가 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영훈이 저에게 저와 영훈의 이야기를 써도 되냐고 먼저 물어봤고 좋다고 했어요. 가까운 사람이 써 주니까, 그리고 둘의 공통된 경험이 있으니까 그때의 글을 감동적으로 읽고 넘어갔는데, 이런 자리를 빌려서 이야기를 하면 거기엔 영훈의 목소리만 있지 내 목소리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영훈의 메일링 구독자에게 저의 이미지는 글 안에 나오는 모습으로 남을 테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그때와 달라졌는데 하는 생각도 해 보고요. 물론 타인은 제가 생각하는 만큼 영훈의 글에 나오는 제 모습을 신경 쓰진 않을 테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네요.
훈: 저는 은솔 말대로 소설과 수필 사이의 이야기를 메일로 보냈었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공해서 쓰고 공개한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당사자에게 쓸 것에 대해 허락을 구하고 내용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당연히 당사자도 글을 읽고 그때와 다르게 느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겁쟁이니까 (웃음) 이런 일을 안 만들기 위해서…
욱: 그래서 아예 이런 일을 만들지 않는 거네요.
훈: 그렇게 되는 거에요.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메일링을 처음 쓸 때는 책으로 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책으로 못 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때는 그 순간에만 괜찮으면 괜찮았는데 이제는 그걸로는 안되는 거죠. 그래서 앞으로의 나는 소설을 더 쓰겠구나 하게 되었어요.
솔: 그래서 에세이를 모으다 보면 또 어려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 사람과의 관계는 이만큼이나 촘촘한데, 저 사람과의 관계는 느슨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비교가 될 것만 같은.
림: 글을 읽어 보면서 관계를 추측할 수 있잖아.
솔: 응, 물론 에세이는 현실에 많이 닿아 있으니까 이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해서 비치는 감정이 달랐을 때, 간극이 너무 커서 딜레마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물론 아직 거기까지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욱: 나에 대해 써 준다고 해서 아주 많이 고민하고, 큰 용기를 내서 어렵게 허락했는데 되게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듯 썼거나, 내가 아닌 이야기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데 나를 잠깐 넣었다 말았다거나 하면 서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까운 사이라면 더더욱이요. 또 반대로 아무렇지 않게 허락을 했는데 나에 대한 감정이나 비중이 너무 크면 당황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요. 가까운 인간 대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또 그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어려운 것 같고요.
림: 둘이 가지고 있는 관계성도 중요한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사이에서, 나에 대해 쓴다고 하니 좋은 이야기만 썼을 거라 생각하다가 오히려 반대로.
욱: 반면교사처럼 쓰기도 하고.
림: 그렇게 써버리면 어떡하지. (웃음)
욱: 작가는 결국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작가라는 정체성 자체가 주변 사람과의 관계와 충돌하는 것 같아요. 매일매일 허구의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그 허구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건데.
훈: 그게 한편으로는 불리하다는 생각도 해요. 에세이나 소설도 결국 이야기고 우리는 길을 걷거나 카페에서 누가 이랬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다들 하고 살잖아요. 근데 그건 기록에 안 남으니까 넘어갈 수 있고 글은 명징하게 기록으로 남아 버리니까. 잘못한 것은 잘못이겠지만 유독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있어 다른 표현 방식보다 그 무게가 크다는 생각도 해요.
림: 말과 글의 무게가.
욱: 그것도 있는 것 같아요. 유림씨가 아까 말한 것처럼, 나에 대해 쓴다고 하면 당연히 나를 좋은 방식으로 써 주겠지 하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하게 되잖아요. 영화든 글이든 어떤 서사에서 등장인물을 다룰 때 현실의 인물에게서 안좋은 것을 보고 느꼈어도 그걸 현실의 인물 모습 그대로 쓸 수는 없잖아요. 또 제가 생각해 봤는데 나의 지인이 나의 이야기인데 교묘하게 잘 감춰서 썼다고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이상할 것 같긴 해요.
훈: 맞아요, 어떻게 써도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무조건 쓰면 안 돼 하는 건 아니겠지만요.
욱: 만약 영화로 생각해 본다면, 저는 제가 악역이어도 상관없는데 개연성이 있고 작품이 좋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다들 웃음) 무슨 말인지 아시죠.
림: 작품성을 보아라~ (웃음)
욱: 맞아요. 소설이 좋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골드러시>에서 진우가 문제적 인물이지만 소설이 좋으면 그렇게 등장해도 될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그렇게 써 준다면 좋을 것 같고요. 그런데 만약 썼는데, ‘이러려고 나를 썼단 말야?’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좀 아니겠죠.
림: 이 부분도 다르지 않을까요. 내 이름만 빌려준 것과, 내게 있었던 일을 쓰는 것도요.
욱: 보통 이름은 잘 안 빌려주지 않나요. 바꿔서 쓸 것 같은데요.
림: 그런데 만약 나는 이 이름이 너무 좋고 잘 어울려서 꼭 써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욱: 저는 그건,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림: 어, 진짜요? 이름은 괜찮을 것 같은데.
솔: 오, 의외다. 그냥 이름은 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자기가 쓰고 싶은 인물의 이름이 만약 은솔이라면, 당황하지 않게 먼저 말해주는 거죠.
욱: 저는 그렇게 물어본다면 그냥 쓰라고 할 것 같아요.
훈: 나도. 그걸 뭘 물어봐? 하고 생각할 것 같아.
욱: 저는 그런 생각이라, 더 물어보면 싫을 것 같아요. 이름은 동명이인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겹치는구나 생각하면 되는데, 굳이 물어본다는 건 저라는 사람을 의식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냥 썼으면 대욱이란 이름이 세상이 많으니까, 라고 생각했을 텐데.
훈: 경주 이씨, 34대손 무슨파… 이영훈 하면 또 몰라.(웃음)
욱: 다들 할 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질문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네요.
솔: 저희 한 시에는 집에 가야 해요.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볼까요.
림: 네,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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