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 다들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네요. 작품별로 이야기 할까요? 분명히 작품마다 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서요.
림: 좋습니다. 우선 임솔아 작가의 <초파리 돌보기>를 제일 좋아하는 작품으로 뽑은 분께서...! 포문을 열어주시죠.
욱: 하하. 저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제일 좋았어요. "이원영은 초파리를 좋아했다.” 처음엔 정직한 문장이구나, 생각했지만 다 읽고 나서 보면 초파리 자체를 좋아하는 것보단 초파리 돌보는 일을 하는 자신을 좋아하는, 직업이 있는 자신을 좋아하는… 많은 것들에 대한 좋아함을 담은 정확한 문장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순간이 되게 좋았고, 그런 의미에서 제목도 정직하구나, 생각했어요. 초파리 돌보기라고 쓰지만 사실 이건 누가 누구를 돌보는, 마음을 쓰는 이야기잖아요. 그 자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조금씩만 말해도 큰 걸 말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첫 문장과 첫 장을 읽고 나서 제목을 봤을 때의 느낌을 말하고 싶었어요.
훈: 저는 공원에서 이 작품을 읽었는데 제게 자꾸만 무언가를 적게 만드는 소설이었어요. 저는 평소에 저희의 엄마 세대가 살아가는 삶을 익숙한듯 새로운 관점에서 묘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소설에서 그런 것에 대한 힌트를 얻었달까요? 그리고 초파리라는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 '소설'과 '삶'에 대한 사유가 한 소설 안에 잘 녹아들어있어서 좋았어요. 내가 왜 소설을 읽고 쓰고 싶은지를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좀 더 잘 알게 됐다고 해야할까요. 나는 앞으로도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겠구나 확인하게 된 소설이었어요.
문장으로는 원영의 삶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담담한듯 신비로워서 좋았어요. 중년 여성의 사회적 위치로 다양한 일과 장애물을 씩씩하게 견뎌오던 원영이 과학기술원에서 초파리 돌보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곳의 뻥 뚫린 넓은 도로를 보고 “저 멀리까지 아무것도 가로막는 게 없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너무 멍한 거예요. 덤덤한 문장인데 공간이 주는 신비로운 느낌도 들고. 원영이 텔레마케터를 비롯해 겪어왔던 힘든 노동의 시간들이 여기서 해소되는 느낌도 들고. 또 그곳의 거위들이 원영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원영은 느낄 수 있었다.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라고 적힌 문장도 좋았어요. 엄마 생각이 되게 나기도 했고요. 울 엄마의 시선은 어떨까 궁금하고.
솔: 저는 작가 노트가 인상 깊었어요. 그전에 읽었던 작품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쓰였는지 일부러 에둘러 말하는 듯, 희미하게 남기는 게 작가 노트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 소설이 나오게 된 배경의 일부가 담겨져 있는 작가 노트는 처음이었고, 작가 노트 덕분에 이 소설이 더 빛난다고 느껴진 건 생소한 경험이었어요.
림: 저는 29p에 원영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했을 때, 택배기사에 관한 일화, 자기 책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눈물이 나서 못 읽었어요. 카페에서 읽다가 접었는데, 저희 세대의 엄마의 모습, 그런 이야기를 잘 집어낸 지점이고 이 지점만으로도 소설이 무척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지점 때문에 마지막의 결말이 ‘시시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도 너무 안심됐고... 한편으론 여기선 이렇게 끝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겪은 우리 엄마는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단언하듯 해피엔딩이라고 말해주는 게 큰 위로처럼 다가왔어요. 뭔가 제가 엄마한테 해주지 못했던 걸 소설이 해준 느낌. 물론 떠넘기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작가의 그런 마음도 너무 좋아서 이 부분이 제일 좋았어요.
솔: 똑같은데 접어두고 밑줄 치고.(웃음) 예전에 어떤 메일링에서 리베카 솔닛이란 작가가 자기 책상을 갖게 된 후부터 글을 쓰게 됐다는 내용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되게 와닿았던 것 같아요.
림: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불륜을 의심하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고, 차라리 의심을 받고 마는 ‘나만의 공간’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건데, 엄마는 그런 공간을 가지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던 것 같아요.
욱: 또 좋았던 건, 아무도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지 않아서 좋았어요. 일상에선 아주 많이 화를 내잖아요. 약속 시간을 착각한 친구에게 화를 낼 수도 있는 거고, 엄마한테 이지경이 되도록 뭐 했냐고 화낼 수도 있는 거고, 엄마는 딸에게 모두가 죽는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이런 걸 쓰면서 뭔 글을 쓰냐,라고 탓할수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책망하는 장면이 없어서 좋았어요.
솔, 훈: 나중에 뒤에서 얘기할 <미애>가 생각나네요. (웃음)
훈: <미애>에서는 여기와 달리 엄청 날이 선 말들이 나오니까.
욱: 소설을 작동시키는 방식이 다른 것 같은데, 이 소설에 있는 그냥 봐주는 태도가 좋았어요. 어쩌면 그게 ‘돌보기’의 본질이 아닐까요.
림: 그냥 바라보는 일.
욱: 타인을 통제할 수 없는데 타인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잖아요. 또 화를 내는 것 자체도 마음을 쓰는 일이잖아요. 저는 20p에서 지운은 종종 치료 경과에 대해 물었다. 잘 지낸다고 말했는데 3년이 지나서 집에서도 털 모자를 쓰고 있고, 그런데 서로 주고받는 말은 괜찮아? 괜찮아. 그런 부분이 유림씨가 말했던 아마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괜찮냐고 묻는, 따로 떨어져있는 사이에서. 사실은 괜찮지가 않잖아요. 어쩜 마음이 쓰이는 순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위안 같은. 서로 걱정하지 않도록. 그런 장면들을 담담히 잘 보여준 것 같았고.
또 좋았던 장면이 지유가 치온에게 덤덤히 설명을 하고, 치온이 “착오가 아닌 걸로 만들죠.” 라고 하면서 쉽게 치온이 나와서 같이 걷잖아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이 장면이 되게 좋았어요. 현실과 소설은 되게 다르고, 작가는 없던 약속도 만들어서 그 사람을 돌보는 방식으로 만든 건데, 앞에서 보면 지유가 원영을 돌보듯, 지유에게도 돌봐주는 사람이 필요했구나. 그런 것들을 많이 느꼈는데,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를 돌봐줘, 내가 널 돌봐줄게, 이런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있잖아요. 저는 그런 순간들이 많이 생각이 났어요. 직접적으로 병을 치료해주진 못하더라도 이런 돌봄의 방식이. 우리를 작동시키는 것들이요.
돌보는 과정에서 무슨 힘든 일 있어요? 이렇게 묻지 않잖아요. 그냥 평소의 이야기를 하면서 덤덤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 안에서 되게 결말에 이르기까지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누가 누구에게도 치료의 방법을 알려주고 있지 않았는데, 그래도 로얄젤리를 만나 원영은 다 나아버렸다. 그런 시시한 해피엔딩이 주는 위대한 감동. 이 소설에서 다룬 그런 순간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솔: 대욱씨의 말이 결말에서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지점들을 다 짚어준 느낌이에요.
욱: 제가 지유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부모님과 많이 오래 떨어져서 살고 있고, 그리고 다들 이야기해준 것처럼 일하는 엄마에 대한 생각이라거나,또 글을 쓰고 있고, 예상 질문을 하고 예상답변을 하는 그런 순간들이. 그런데 다들 그런 순간을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면서 저도 어떤 날은 위로받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날은 집에 전화하지 않게 되거든요. 지유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훈: 돌보기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는데 저는 돌보기의 속성이 작가의 작가 노트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어요. 작가 노트 40p, "나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믿어본 적 없어지만, 영원이라는 단어를 이름으로 한 엄마의 마음은 좋아했다.” 라는 문장이 사랑의 속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문장이라 좋았어요. 내가 믿지 않아도 사랑하는 이의 믿는 마음은 좋아하는 것이 돌보기의 방식일 수 있겠다 싶었고요.
또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 언니와 동료 작가에게 물어본 에피소드를 적은 부분이 인상깊었어요. 만약 누가 소설의 엔딩을 정해두고 원하는 대로 써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댜고 물어보니까 언니는 ‘니가 그런 부탁은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하다가 그 사람이 엄마라니까 표정이 바뀌고 차마 말은 못하지만 엄마의 바람대로 작가가 써주길 바라잖아요. 동료 작가에게 말을 했을 때도 동료는 소설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쓰면서 갈등을 겪고 나면 소설은 망해도 내가 나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죠. 소설을 견뎌갔다,라는 말까지. 저는 그게 삶을 견뎌갔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 소설이 삶을 견디게 하고 그렇게 산 삶이 또 소설을 쓰이게 하며 서로를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욱: 그게 아마 작가 노트에 맨 마지막에 있는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던 시간’이라는 말이랑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훈: 결국 타인을 돌보는 게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이 되었던 거죠.
훈: 한편 너무 좋아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목이 <초파리 돌보기>인데 초파리는 끝까지 함께 가지는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소설에서 좋았던 점은 초파리에게 여러 개성과 특성을 부여하면서 초파리를 우리와 같이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원영의 실수로 초파리들이 죽고 나서 초파리들은 소설 속에서 숨을 잃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욱: 36p를 보면 그 지점에서 원영의 초파리를 아름답게 써주는 게 작가의 초파리를 돌보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저는 생각했어요. 사실 초파리가 흰쥐처럼 키워지는데, 그런 방식으로 쓰는 것을 작가가 생각을 해서 초파리에게 로열젤리를 먹여서 2배의 삶을 살게 해준 게 아닐까. 마지막까지 초파리 돌보기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고 생각했어요. 초파리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요.
훈: 저는 분명 아쉬움을 느끼고 내가 이걸 쓴다면 어떻게 쓸까 생각해봤던 것 같아요. 초파리의 희생에는 분명 의미가 있었지만 원영의 헤피엔딩으로 가기 위해 소비된 느낌이 있었고, 쉽진 않겠지만 분명 모든 존재의 너머로 가는 엔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욱: 원영이 초파리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저는 조금은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내가 키우는 초파리야, 하면서 초파리를 보여준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초파리 키우는 것을 일의 성과로 보여주는게 아니라 초파리에 정이 붙어서 또 하나의 돌보기가 시작되려나 했는데 맨 뒤에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렇다면 이 지점도 어떻게 썼어야 했을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훈: 원영이 했던 일이 결국 어떻게든 원영을 살리는 일이 되잖아요.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삶 곳곳과 무관하지 않다는 메세지를 주고 있어서 앞으로는 그 무관하지 않음이 보다 세심하게 작동하는 이야기들도 기다려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이 건네준 돌보는 마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