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 이번엔 김멜라 작가의 <저녁놀> 얘기를 해볼까요? 읽는 재미가 있었다고 했던 은솔 씨 먼저.(웃음)
솔: 대담을 준비하며 미리 만들었던 질문 중에서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은 장면이 있었잖아요. 저는 영훈과 대욱의 <저녁놀>의 감상이 궁금했어요. 이게... 약간 성별 구분 같기도 한데, 너무 궁금했거든요. 남근의 상징인 모모가 딱 나오기 때문에.
림: 나도 통쾌했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불쾌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솔: 처음엔 그 생각도 못 했다가, 책의 맨 뒤 부분에 심사위원분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모모의 존재를 변화하면서 받아들였다는 글을 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졌어.
훈: 저는 일단 저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남성성에 딱 부합하는 위치는 아니다보니까, 되려 남근중심주의가 해체되고 풍자되는게 통쾌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이 부분은 그래서 대욱이 형과도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다 싶었고.
욱: 저는 물어볼 줄 알았고요, 여기 안에선 비슷하게 읽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읽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고요. 평론가분의 평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나 우스꽝스럽고 보잘것없는데 이걸 가지고 또 난리를 칠까? 소설이 그냥 재밌잖아요. (웃음) 저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도깨비 방망이? 그 녹즙기를 안마기로 쓰기도 하잖아요. 그냥 용도에 맞게 알아서 쓰는 건데 그걸 가지고 남근이 어쩌고 그런 얘기를 하는게, 옛날에 남자들 부엌에 들어오면 뭐떨어진다, 그런 얘기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딜도도 그런 방식으로 쓴 건가? 정말 이거 가지고 난리가 아직도 안 나는 걸 보면 저는 그만큼 2030 남성들이 책을 많이 안 읽는 구나, 생각했어요.
(다 같이 웃음)
욱: 책을 안 읽어서다. 이게 만약 노래가사거나 영화였으면...
솔: 38p 권희철 평론가의 말 중에 “남성독자에게 거울처럼 작용하는 효과가 있다.”는 문장에 반응을 알아보고 싶었던 건데, 모모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이 책을 읽었을까? 하는 결론입니다.
욱: 저는 일부러 솔직하게 말해줬다고 생각해요. 남성으로 한국에서 자라오면서 그런 시간이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완전히 잘 설명해 줬잖아요. 평론가의 말이. 소설보다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적어준 것 자체가 이 소설의 존재 의의를 이해하고 해준 평론이 아닌가 싶어요.
훈: 여기서 언어의 전복이 일어나잖아요. ‘도서관 가서 책 읽자’가 소설에선 ‘모텔 가서 섹스하자’로 치환되는 것처럼, 저는 이 소설 자체가 하나의 전복된 언어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이 책을 그런 남성들이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아.
림: 이 안에서도 언어를 사용하는 자기만의 규칙이 있어서.
훈: 읽어도 화를 못내. 뭔지 몰라서. 이거... 실어도 되나?
욱: 이거 메일링에 실어도 되겠죠?
(다 같이 웃음)
림: 나중에 모모가 니체나 프로이트를 스스로 공부해서 그런 얘길 하잖아요. 남성의 중요성이 있는데 너희는 그걸 놓치고 살고 있다, 이렇게 화를 내잖아요. 그런데 그 위에서 이미 여자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어서 소통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모모가 더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이제 그 사람들의 세대를 지나서 우리만의, 현재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여자 둘이 열심히 파를 키우면서 사는게 너무 현실이면서도 그 마음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예뻤어요. 응원하게 되고. 만약 책 속에 있는 세상 중 하나에 들어가야 한다면, <저녁놀>에 들어가고 싶을 만큼. 가장 내일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지점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차 사고를 당했어도 나중에 화를 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하고 다음에는 꼭 화를 내야지, 생각하는 것 마저도.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내일을 생각하고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쓸모도 바뀔 수 있고, 우리의 내일도 어떤 순간을 통해 바뀔 수 있다, 변할 수 있다는 게.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태도가 좋았어요.
욱: 저는 이 둘을 방해하는 남자가 나오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리거나, 쫓아오거나.
훈: 모모 하나로도 충분하죠.
욱: 이 안에서는 그런 존재가 배제되어서 모모로 표현됐지만, 사실 작가가 다음 문장에서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렇게만 적어도 현실적인 공포가 찾아오는 거잖아요. 사실 둘이 사랑을 나누면서도 소리를 조용히 하는 법을 알았다고 해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영수증을 없애도,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이 슬프게도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도 걱정하면서 읽었어요. 둘의 관계를 부숴버릴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설계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이 소설을 재밌게 읽은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림: 그래서 제가 들어가고 싶은 세계라고 했던 것 같아요. 방해받지 않은 세계인 느낌이라. 뒤에서는 항상 갈등이 나오니까. 물론 여기서도 갈등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둘의 세계를 파괴하려는 존재는 없으니까.
훈: 작가는 여기서 남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기보단 그들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안한 느낌? 굳이 필요가 없는거야.
솔: 맞아.
훈: 그래서 자연스럽게 남자가 메인으로 등장하지 않게 된거고, 그게 K-레즈 이야기의 한 모습이고.
림: 쓸모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미니멀 라이프에 충실한.
(다 같이 웃음)
림: 그래서 저는 그 미니멀 라이프가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놀랐어요. 미니멀 라이프가 축약하자면 삶에서 필요 없는 걸 버리는 태도인데 K-레즈들에게는 그게 남성인 거잖아요. 그런 시각 자체가 신선했고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도 유쾌하고 재밌었습니다.
욱: 요즘 여성서사, 여성서사 많이 얘기하잖아요. 그럼에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어떻게든 남자를 끼워 넣잖아요. 그러면서 서사가 작아지고, 특히 드라마나 이런 곳에서는 더 힘들잖아요. 항상 이제 남자, 여자, 남자, 여자. 메인커플, 서브커플. 그래서 더더욱 여성서사에 대한 수요를 해소하기 위해 자본이 많이 도는 매체가 아닌 소설, 시, 웹소설, BL로 이미 넘어간 것 같아요. 그러다 다시 드라마로 넘어오는 경우도 있고, 최근에 <마인>이라는 드라마도 그렇고요.
솔: 저는 이번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읽으면서 제가 왜 단편소설을 좋아하는지 명확해진 게, 드라마에서는 제가 원하는 스토리에 한계가 존재해요. 아무리 세상이 나아졌다고 해도 항상 갈등을 유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서 해를 끼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래서 그게 지치는데, 단편소설에는 그런 인물이 소거되어도 되는 흥미로운 세계인 거예요.
림: 드라마 시리즈로 특별기획, 이런 거 하잖아요. 이런 소설로 그런 드라마화를 해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이런 새로운 시도를 드라마에서도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살인자의 기억법>같은 추리소설 뿐만 아니라 이런 소설들도 영상으로 다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훈: <저녁놀>을 보면서 여성들의 우정을 그려낸 애니메이션 <투카 앤 버티>가 생각났어요. 왜냐하면 이 저녁놀에 나오는 관념적인 부분들을 어떻게 이미지적으로, 영상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고 애니메이션이면 이 소설이 지닌 위트와 문제의식, 현실적인 지점과 관념적, 철학적 지점들을 잘 버무릴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림체는 약간 핀과 제이크처럼.
솔: 저만의 대상을 뽑는다면, <저녁놀>을 저만의 대상으로 정하고 싶었어요. 이런 소재로 소설을 쓴 시도 자체가 너무 좋았거든요. 게다가 이 세계가 방해받지 않은 세계인 동시에 현실의 사건 사고도 존재하고, 둘이 대파 가지고 싸우는 현실적이고 아주 작은 지점도 있고, 모모라는 의인화도 있고, 블랙코미디까지 절묘하게 섞여서 대상으로 뽑고 싶었어요.
림: 선언문 읽고 막. (웃음)
훈: 철학자들의 남성 중심 사상 이런걸 비꼬는 것도 통쾌했어. 요리에 대한 부분도 인상 깊었고. 요리 재료를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도 나의 사회적 위치가 드러난다는 게.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느끼는 지점이지만 잘 발화하지는 않는 그 사실을 짚어주는 게 좋았고. 요리와 주거처럼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지점으로부터 나아가 사회 안전망, 차별금지법같이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우리에게 어디 있는가, 그렇게 언급해주는 게 좋았어요. 필요한 언어의 명명.
솔: 저는 이 둘이 너무 부럽다고 생각했어요.
림: 이 상황이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읽는 내가 평화로워지는 느낌.
솔: 헤어지지 않을 커플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도 오랜만이었어. 이 커플은 헤어지지 않을 것 같네, 하는 안정감이 있었어. 그리고 마지막에 눈점, 먹점의 실명을 언급하는 문장이 나오는데 갑자기 그 별명을 붙이지 않았다면 이 소설이 이렇게 좋을 수 있었을까? 란 생각이 들었어. 지영이, 이런 평범한 이름이었다면 이 소설의 느낌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하는.
훈: 소수자에게 필요한 언어가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그런 걸 스스로 만들어서 이름을 붙여준다는 게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저의 관점을 바뀌게 한 문장이 있는데 91p에 “이름에 갇히고 쓸모에 묶이면 내 상황은 어떻게 되는 걸까?” 라며 이어지는 부분이에요. 저는 항상 언어가 없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거든요. 언어가 없다면 더 자유롭지 않을까. 그게 내가 더 바라는 세상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여기선 언어가 없는 것을 바라기 보다 더 다양한 언어를 만들어서 붙여주자, 라고 제시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게 좋았고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림: 저도 언어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라캉학파에서 언어를 이야기하면서 여성을 대변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여성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여성의 언어를 이 소설에선 책갈피, 도서관 이런 식으로 만들어 사용하잖아요. 이런 점이 아까 영훈이 말한 것처럼 어떤 약자든, 소수자든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세상을 보여준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어요. 언어는 크지만 갇히기 쉽고 우리는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언어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의미가 어느정도 퇴색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거기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전해주고 있어서 더 설득력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언어를 뒤집어 엎고 재창조하고 재구성을 해야한다, 이런 딱딱한 방식으로 말하는게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되는 모습을 보여준, 그런 발견도 좋았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