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시간은 저희에겐 자유롭지 않지만, 이 노래를 듣는 여러분에게는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짙게 깔린 스모그 너머 핀 라이트 아래, 새소년의 황소윤이 서 있었다. 나는 어쩌면 눈을 마주칠지도, 잘하면 손을 흔들어줄지도 모르는 거리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하지 않았고, 그의 말을 끝으로 기타 사운드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었다. 새소년이 2021년 발매한 첫 싱글. 자유 였다.
공연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그의 말을 떠올리곤 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오랜만에 본 친구들과 하이볼을 마시다가도, 졸린 눈으로 이를 닦다가도 문득, 자유로워서 만든 노래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고 싶어 만들었다는 그의 말이 자주 생각났다. 내 하루에 불쑥 튀어나올 만큼 그의 말이 내게 남은 이유는… 아마 그의 말을 반박하고 싶어서이리라. 창작은 자유롭다고. 사실 이 말은 참에 가깝다. 창작은 자유로워야 하니까. 하지만 창작자는 어떨까. 물론 자유로워야 한다. 고등학교 사회 탐구 영역 시간부터 교양 수업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들어온 ‘인간의 자유의지는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우리가 만들어온 우리의 권리를 위해서. 하지만 그럼에도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이론과 동떨어진 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창작자는 자유로울까. [창작물]은 자유로울 수 있으나 [창작자]로서 자유롭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옆에 책임이 따르는 순간 자유는 한 발짝 물러나기에. 그의 말대로 창작자와 자유라는 단어는 가까이 있으나 맞닿을 수는 없는 한 뼘 거리의 평행선에 놓여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겐 그 평행선이 하나로 보였다. 두껍고 강한,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진리를 닮은 선. 그렇기에 가장 자유로울 때 창작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디자인과 글을 통해 ‘일’의 세계로 진입하고 나서야 그 둘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만 그 위태한 선들 위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창작물을 접하게 되는 관객이었다. 나의 표현과 관객의 이해, 혹은 호응이 존재할 때 창작은 완성된다. 창작자는 관객의 호응과 이해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창작자이자 아티스트들은 그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을 수치화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시간일 것이다. 창작이란 어느 날 번뜩 떠오른 영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창작자가 살아온 시간의 총합이다. 정말 데드라인 30분 전 번뜩이는 영감으로 창작을 완성했다고 해도, 그 앞서 고민했던 수백, 수천 시간이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무언가 만들어 세상에 선보이는 이들은 아직 형태도 모르는 창작이란 항아리를 채우려 시간을 붓는다.
새소년의 음악에는 그들의 시간이 들어있다. 기타를 연주하는 시간, 베이스를 연주하는 시간, 드럼을 연주하는 시간, 노래를 부르는 시간, 연주의 밸런스를 맞추는 시간, 그것들을 믹싱하는 시간, 들어보는 시간, 주변의 의견을 묻고 수정을 거듭하는 시간, 무대를 준비하는 시간, 시간, 시간. 다른 아티스트들은 어떨까, 화가를 보자.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화 시키는 시간, 구체화 된 생각을 표현할 오브제, 혹은 이미지를 찾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캔버스 위에 다양한 재료로 그려내는 시간, 혹은 표현하는 시간, 그리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엄격히 작품을 수정하는 시간, 시간, 시간. 글을 쓰는 작가는? 꽤 오래전 정유정 작가의 작업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작업을 할 때 주제와 스토리, 하고 싶은 이야기, 등장인물의 특성 등 기본 조건들에 더불어 그 등장인물들이 지내는 공간을 설계한다고 한다. 그의 장편소설인 <7년의 밤>의 경우 등장하는 가상의 호수와 마을, 댐이 언제 열리고 닫히는 지 등을 모두 상세히 설정해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이렇듯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설계하고 운영해내는 시간, 시간, 시간.
이미 창작자의 반열에 오른 분들을 지나 이제 막 자라나는 작은 새싹 같은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 나는 나의 글에 무엇을 담고 있을까. 아마도 내가 느낀 것과 믿는 것들, 그리고 믿고 싶은 것들, 오늘의 기분과 약간의 행복을 알맞은 단어로 변환하는 시간, 글의 뼈대를 조합하는 시간, 전하고 싶은 말을 억지스럽지 않게 녹일 수 있게 다듬는 시간. 누군가에게 닿았을 때 어떻게 느껴지는지 분석해보는 시간, 시간, 시간. 그리고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책임감을 가지고 글을 쓰려 노력한다. (매번 성공하지는 않지만 노력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순간은 분명 자유롭지 않다. 그렇지만 나 또한 바라게 된다. 내가 쓴 이 글이 당신에게 찰랑이며 닿기를. 당신의 생각이 마음이 이 글을 읽고 마음껏 흔들리기를. 혹은 흔들리지 않아도 좋다. 그건 당신의 자유이므로.
메일링 글을 쓰던 새벽, 야식으로 먹던 아이스크림을 보다가 생각했다.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과 닮아있다고. 나는 단어들로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다. 부드러운 우유에 내가 고르고 고른 향신료들을 넣고 찬 아이스볼 위에서 계속 저으며 바란다. 이 찰랑임이 굳어 아이스크림이라는 형태로 완성되길, 그래서 당신이 맛있게 먹을 수 있길. 내 글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따지자면 조금 쌉쌀한 녹차 맛. 그럼 호불호가 좀 있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2월의 밤 동안 아이스크림을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열심히 저었다. 무언가를 만들 때 들여야 하는 시간은 예상보다 항상 범람하고, 삶에 허덕이면서도 집에 오면 아이스볼을 젓는다. 진짜 최_최_최_최종 마감까지 저었다. 마감의 끝에서도 언제나 아쉬움은 남고, 한계를 마주한다. 그럼에도 최대한 예쁘게 포장해 건네본다.
그리고 기다린다. 아이스크림이 당신의 입에서 녹을 시간을.
p.s. 첫 문단에 마지막 문장에서 [자유]라고 적었다가 괄호를 지우고 넓게 비워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