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바다에 도착했다. 애월읍의 검은 현무암 위로 나부끼는 파도와 부서지는 거품, 그리고 바다와는 다른 빛으로 푸른 하늘과 그 푸름에 햇빛을 더한 색으로 자라는 해안가의 나무들. 서울에서 가로수로 만나볼 수 있는 이팝나무나 벚나무가 아닌 이국적인 야자수가 낯설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그 박동이 어떤 긴장과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기쁨에서 비롯됐다는 게 생경했다. 그제야 내가 나의 일상으로부터 멀리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흰 명함 속 직무 아래 깔린 나의 이름을 푸른 종이 위로 꺼내준 기분. 바다와 바람과 나무만 있는 제주의 모서리. 바다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되는 순간. 이곳에선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쓴 글만 읽고도 나를 알아본다. 그때 눈을 뜨는 마음이 있었고, 마주한 건 어제까지 잊어버리고 있었던 푸르게 빛날 줄 아는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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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으셨네요. 오신 김에 조금이라도 둘러보고 가세요. 전날 옆자리 셀러 분이 하신 이야기가 다정한 바람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다. 더불어 제주에 오기 며칠 전 비바람이 심해 비행기가 결항 됐다는 뉴스도 함께. 다시 올려다본 하늘은 티 없이 맑았다. 정말 운이 좋게도. 제주의 변덕스러운 기분을 피한 행운을 카메라에 담았다. 검은 렌즈가 푸른빛으로 물들어 반짝였다. 높은 암석 절벽과 짙어지다 풀어지는 에메랄드빛 바다, 새의 비행, 조금 따갑던 햇살, 머리카락 사이를 투박하게 훑어내리던 바람의 결. 그리고 걸으면서 흥얼거리던 노래들과 이야기, 공기의 맛,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마음들까지 사진에 남겼다. 알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셔터를 누른 순간 중 절반은 지워야 하는 것을. 참 미련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는 것처럼 셔터를 눌렀다. 결국 지우더라도 사진을 정리하는 순간에 다시 만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푸른 바다 위로 나까지 푸르게 보이는 그런 사진으로. 사진을 바꾸고 나서 얼마 뒤 자주 보지 못하지만 여전히 가까운, 오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너한테는 여름이 벌써 왔나 보다. 보는 나까지 시원해져. 뜻밖의 칭찬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 채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몇 번의대화가 오가다가 친구가 마지막으로 보낸 카톡에 손이 멈췄다.
너는 여전히 너답다.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친구나 지인들이 말하는 나답다는, 다정한 단어를 쓰고, 별거 아닌 일에도 쉽게 감동받고 그런 기쁨을 숨기지 않는 모습이 아닐까. 사실 이 모습들은 어딘 가에선 무르고, 마음이 헤프고, 생각이 너무 많고, 그래서 굼뜨다고도 부를 수 있는 것들. 그렇기에 높은 온도의 애정을 담은 ‘너답다’를 들으면 어쩔 도리 없이 녹아버리고 만다. 내가 굳이 무엇이 될 필요 없이 그저 나여도 될 것 같은 말들. 그게 당연한 것처럼. 꼭 누군가의 말이 아니어도, 그런 온도를 담은 순간은 오래 마음에 남 어느 날 찾아오는 슬픔을 데우기도 한다. 너는 계속 글을 써. 나는 네 문장이 좋아. 너는 잘할 거야. 그게 뭐든 말이야.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다 보면 내가 알던 내가 어느새 돌아와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그러면 하루의 끝에서 조금은 내일을 준비할 힘이 생긴다.
제주로 떠나기 전, 하루가 버겁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꿈에서는 늘 실수를 했고 울면서 일어나는 날들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긴 하루가 영영 끝나지 않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비행기에 올랐고, 제주 바다를 봤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쓴 글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처음 느끼는 감정들을 마주하고, 그 속에 잊고 있던 나를 끌어올려 내 옆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부디 모두가 도망칠 힘은 남겨 놓은 채 살아가길 기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낙원이 아니라 삶이니까. 더불어 도망치듯 멀어져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늘 흔들리고 헤매기만 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나아가고 있었다는걸.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삶 위로 내딛은 발자국들은 겨우 한 걸음 멀어져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를 발견하기 위해 도망쳐야 한다면 기꺼이 도망 치리라.
하루가 끝나지 않는 것 같을 때,
그러다가 문득 나의 이름이 어색해질 때면,
부디 잠시 도망치기를.
그렇게 일상과 멀어지기를.
그리고 도망친 곳에서 마주한 당신의 낯선 눈동자를 오래 바라보고 돌아올 것.
집으로 오는 길에는 잃어버렸던 당신이 돌아와 당신의 어깨를 감싸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