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내가 있다면
월정리 해변 근처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혼자 여행하는 동안에는 좋은 것을 발견하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부지런히 올렸고, 마침 사진을 본 친구가 자신도 제주에 왔으며, 월정리로 가고 있던 길이라고 메세지를 보내왔다. 워낙 부지런하게 사는 친구라 서울에서 보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제주 여행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니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다. 카페 위치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를 건네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는 서울의 어느 카페에서 만났을 때처럼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요즘 하는 일, 귀여운 강아지 자랑, 주변 친구들 사는 이야기.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웬일로 일정이 없어 만들 수 있었던 이번 번개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이야기 하다 보니 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며칠 뒤 제주 북페어에서 그리고 서울에서도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각자 다음 일정이 있어 짧은 만남을 마무리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 뒤섞여 헤어지던 모습 대신 각자 타고 온 차에 시동을 걸며 작별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제법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제주의 모습이 생겼다는 사실에 미소가 지어졌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검은 돌이 늘어선 카페 주변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한적한 4차선 도로를 달렸다. 제주에서 운전하다 보면 윤슬이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만나기도 했지만 대부분 시간을 한적한 국도와 건물이 늘어선 시내를 달렸다. (아마 머무는 동안 숙소가 내륙에 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돌담 안에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을 발견하면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의 낭만에 빠져들다가도, 가로수 곳곳에 걸린 현수막, 농사를 짓는 밭, 연립주택과 간판이 잔뜩 걸린 상가 풍경을 보며 사람이 사는 제주를 생각했다. 누군가 운전을 해주는 차 뒷좌석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을 할 때는 관광지로 보였던 섬이었는데, 운전석에서 보이는 넓은 차창 너머로는 어떤 누군가가 날마다 몇 번씩 오가는 도로, 새로 지어지는 건물, 개업과 폐점을 반복하는 상가, 가족이 함께 사는 집, 평범한 삶이 있는 제주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루는 전날 한라산을 오를 때 입었던 옷을 세탁하기 위해 아침 일찍 시내에 있는 코인 빨래방을 찾았다. 슬리퍼에 모자를 눌러 쓰고 와서 이불 빨래를 하는 주민들 사이로 상대적으로 조촐한 빨랫감을 세탁기에 털어 넣었다. 카드 충전식 빨래방에 다니다 오랜만에 동전 교환기를 마주한 탓에 버벅거리다가 쏟아지는 동전을 받지 못했다. 고요한 빨래방의 적막을 깨고 요란하게 떨어진 동전을 주우며 얼굴이 붉어졌지만 핸드폰을 보며 느긋하게 주말 아침을 즐기는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음 목적지는 잠시 생각하지 않고 빨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아가 모닝커피를 테이크아웃했다. 플랫화이트를 홀짝이며 이른 휴일 아침이라 문을 연 상점보다 닫은 곳이 더 많은 거리를 걸었다. 어제보다 한 발 더 봄에 가까워진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잎이 무성해진 사월의 벚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이파리 사이로 빛은 일렁거리고, 바닥에 떨어진 벚꽃잎이 바람의 방향을 따라 얕게 뒹구는데, 스무 살 무렵의 봄에 걸었던 길과 스물둘쯤 자주 먹던 쓰고 고소한 커피 맛이 떠올랐다. 정확한 날짜나 장소는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적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 기분에 취해, 방금 처음 걸어본 길이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 이곳에 아주 오래 살았던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벚나무 길의 끝에서 서울에서 볼 수 없던 열대 계열 나무와 현무암을 발견하고 신기해하며 카메라를 켜기 전까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