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관에 오기 전, 보고 싶던 공예품이 있어서 보러 갔다가 차마 전부를 담지는 못하고 아주 가까이서 찍은 사진이에요. 그리고 전시를 보고 나와 저 창을 보며 친구들과 각자 마시고 싶은 커피를 골랐어요. - 사진에 제목을 붙여보자면요. - 밭의 시간. 커피집 안에서 바라본 풍경. - 메모도 써두었나요. - 머물던 그림들에 호퍼가 붙인 제목을 써두었어요. - 하나씩 말해볼까요. - 아침 7시. - (조금 뜸을 들이다가) 네. - 계단. - (눈을 계속 바라본다.) - 바다 옆의 방. - 그림을 보며 대화를 나눴나요? - 전시장 안에선 서로가 말을 아꼈어요. - 기억나는 말이 있나요? - 호퍼가 그린 그림 속 케이프 코드의 탁 트인 풍경과 언덕 위의 집, 호퍼와 조가 차를 타고 달리며 담은 하늘 같은 바다나 녹빛 파도가 넘실대는 산을 보면서 제가 작게 그런 말을 했어요. 이런 풍경을 보며 부부가 싸울 일이 뭐가 있을까. - 바보 같네요. - 그러니까요. 저도 바보 같은 말이라 생각했어요. - 솔직하기도 하고요. - 그런가요. 겪어보지 않아서 쉽게 뱉은 말인 것 같아요. 제가 호퍼도 아니고 조도 아니면서 호퍼의 그림을 보고 그런 말을… - 호퍼도 아니고 조도 아니니까 하는 말이죠. 말하고 어땠나요. - 나는 어쩌면 로드트립을 하며 노래하고 편지를 쓰는 삶을 살고 싶구나 싶었어요. 투닥거리면서도 함께 운전대를 잡을 오래된 친구와 함께. 그 드림을 실현해 본 사람이 남긴 작품을 보면서 마음과는 다른 말을 뱉었고요. 그 말은 뱉은 건 부끄러웠지만 그 말이 호퍼의 영혼에 닿았다 해도 호퍼는 저를 결국 이해해 줄 것만 같아요. - 왜죠. - 호퍼는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 무엇을. -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 기다린다는 건 뭔가요. - 우리의 대화가 시가 될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는 거요. -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건. - 그냥 그곳에 머물러서 이따금씩 관찰하면 돼요. 우리 사이에 느슨하고 보이지 않은 유연한 선이 있다 생각하고. - 미술 작품을 보듯이? - 그렇죠. 어떤 그림 앞에선 온 마음이 풀려버리고, 어떤 그림은 보고도 전혀 보지 못하기도 하면서. - 전부 기억하고 싶지 않나요. - 전부 다 기억하려다 보면 되려 놓치는 게 많아요. - 그럼 어떤 걸 기억하는 게 좋을까요. - 누군가가 붙잡으려 하는 순간을 관찰해 보면 어때요. 미술관을 예로 들어보자고요. 호퍼에 습작 앞에서 머쓱해하며 오래 머무는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호퍼의 인터뷰 영상을 관람하려는 사람, 전시를 보고 나와 마그넷을 사고 서재 한 모퉁이에 호퍼의 유명한 그림을 두는 사람, 아직 전시를 보고 있는 동행자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나무를 보는 사람의 모습 같은 것. - 귀한 순간이네요. - 그러니까요. 어릴 적 소풍 가서 보물찾기 하는 순간 같달까요. 힌트가 있어요 그곳엔. 우리는 모두 같은 시공간에서 저마다의 그림을 보고 있고. 그 장면을 그림처럼 바라보고. - 프레임 속 프레임. - 호퍼의 그림을 보는 사람을 그림 보듯 바라보는 것. 그러다 보면요. 어디까지가 그림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잘 구분되지 않을지도 몰라요. 마치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이 삶보다 더 생생하고, 인생은 더 소설 같은 것처럼. - 그날도 그랬나요. - 네 그날에도 창문과 빛과 숲, 프레임 안에서 바깥을 보는 사람들의 사연 있는 얼굴들이 곳곳에 있었어요. 매 순간이 딱 한 번뿐인 그림들이죠. 그러니까 모든 프레임들은 오랜 기다림이기도 하고요. - 그러니까 미술관은 기다림이 만나는 곳인가요. - 네, 펼쳐지기를 바라는 책들이 모인 도서관처럼.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고 끝끝내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기도 하는. - 어쩐지 위로가 되네요. (나는 왜 당신에게 위로를 받게 될까.) - 당신에게 감당할 수 없이 커다란 것들을 미술관에 걸린 단 하나의 작품처럼 바라봐요. 단 하나의 붓터치나 자꾸만 보게 되는 색 앞에서 그 그림에 당신의 전부를 담아 바라봐도 좋고요. - 그 그림들을 이어 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숲이 되나요. 아니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이 되나요. - 숲도 오래 보다 보면 텅 비어버린 방이 되어요. 비어있는 방이 나무로 가득 차 있기도 하듯이. - 그럼 그 방과 숲 사이에 놓인 창. 창을 통하는 빛은 어디서 오나요. - 우린 그것이 궁금해 때때로 책을 읽고 그림을 보지만요. 사실은 무엇을 보든 나의 안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끝없는 지평선. 고요한 바다. 거대하고 부드러운 나의 전부. 그곳을 떠다니는 나의 앰버그리스. 그러니 아주 커다란 것들 앞에 주눅 들지 말아요. 빛은 아주 깊은 어둠이 있는 곳으로부터 오고 있어요. 마음이 가는 쪽으로. - 당신은 지금 나랑 무얼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 그날을 그림처럼 그려보고, 창밖으로 보던 숲 속의 나무들을 내 방 안으로 초대하고 있어요. 당신은 나의 전나무이군요. - 난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어요. 지금은 살아있고요. - 고맙다는 말은 우리 사이에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입으로 뱉어 말해보고 싶어요. 고마워요. - 나도 고마워요.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하나요. - 우리의 대화를 읽게 될 이들의 프레임을 상상해보려 하죠. 마치 호퍼의 그림 속 책을 읽는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들의 얼굴엔 저마다의 숲이 있을 거예요.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빛이 드는 순간을 기다립시다. 멈춰버린 오전 일곱 시여도 좋고 한낮이어도 좋고 저무는 시간이라면 더 좋을 그 액자의 테두리들을.
나는 그 뒤로 침묵했다. 그의 얼굴엔 내가 일부 있었고, 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그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가 아끼는 수많은 시작들이 가라앉으며 황혼이 들면 그는 나에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의 눈에 내가 있는 순간이 다시 오기를 가만히 기다려야지. 그동안은 그가 머물던 그림과 그 그림을 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여도 괜찮은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