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해둔 약속이 아니었다면 나가지 않았을 거야. 비가 오면 포장을 뜯은 건빵처럼 늘어지게 돼. 건빵이라면 퍼석거리기만 하겠지만 사실은 배수구에 쌓인 머리카락처럼 제멋대로 헝클어지는 것 같아. 흐트러지고, 뒤엉키고, 휘청이고… 왜 마음처럼 되지 않을까. 막상 만나면 누구보다 반갑고 좋은 사람들인데도 기껏 날씨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꺾여버린다니. 햇빛이라면 달랐을 거야. 하지만 햇빛이 아니더라도 오늘은 오늘의 기쁨이 있을 거야, 라는 쉬운 낙관에 한번쯤은 기대 보고 싶어.
오늘은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를 보러 왔어. 사실은 두 번째로 보는 전시야. 그만큼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렇게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했거든. 나는 좋아하는 책이 있으면 한 번 더 읽고, 좋아하는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좋아하는 곳에 한 번 더 가곤 해. 낯선 장면에 기뻐하는 것만큼이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함을 발견하는 일을 좋아해. 너무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처음인 것처럼 생경할 때가 있기도 하고. 그런 기분을 느끼며 <나의 미카엘>을 몇 번 읽었는데 이제 한나와 미카엘이 만나는 부분은 그래도 조금은 생생해지는 느낌이 들어. 꼭 부드러운 손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넘어지는 누군가를 잡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이 소설을 설명할 때면 곡물빵이나 나무바닥 같은 것이 떠오르는 건 아마 미카엘의 거친 손 때문일까. 나는 여전히 한나의 이름을 단번에 기억해내지 못해 다시 찾아보았지만 오늘은 또 어떤 순간에 처음인 것마냥 머무르는 풍경을 보게 될까.
어떤 유물이나 그림 앞에, 혹은 그만한 것도 못 되는 자투리 종이에 적힌 캡션 같은 것에 고개를 기울이기도 하니. 그러다 가벽과 가벽이 어긋나게 맞물린 모서리를 발견하거나 획 하나가 떨어져 이응이 되어 버린 히읗을 알아채고는 외려 네가 민망해하니. 네가 지나쳐 버린 풍경 앞에 누군가가 온종일 서 있는 순간을 기억하며 전시장을 빠져나오니.
있잖아, 때론 의무감으로 작동하는 욕망도 있어. 잘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인스타그램에 멋진 사진을 올리려 하고,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는… 좋은 시를 보면 좋은 글이 쓰고 싶어. 멋진 춤을 보면 손끝을 뻗고 싶고. 좋은 그림 앞에선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인데도 마치 내가 그토록 원했던 장면인 것처럼. 생의 마지막이 있다면 그곳이었으면 하는. 너도 한때는 아주 조금의 너를 놓아 두고 왔던 적이 있니.
호퍼의 전시를 보고 조세핀을 알게 됐어. 그러자 자연스럽게, 혹은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젤다 피츠제럴드나 알마 말러를 떠올렸고. 미카엘의 이야기니까 한나를 잊었을 거야. 내가 본 전시는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였으니까, 조세핀을 그제서야 아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저당잡지 않고도 살며 사랑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믿지 않으려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순간이 언젠간 왔으면 해.
밤은 흐르고 빗방울은 바다로 되돌아가고 있네. 비가 오는 날엔 따뜻한 커피가 좋아. 나는 여름에도 따뜻한 커피가 좋아. 따뜻한 커피의 향이 좋고, 따뜻한 커피를 홀짝일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좋아.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좋아하는 책을 올려두고 바라보는 순간이 좋아. 꼭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도 돼. 그림을 잘 몰라도 미술관에 가서 온종일 서성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런 너의 발걸음을 마음에 품어둘 수도 있겠지. 마음이 가는 대로, 흩어두고 싶은 대로 그러다 오렴. 돌아와선 너의 얘기를 들려 주겠니. 언제인가 그럴 날을 기다리며. 그러면 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