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기 위해서
11월, 새벽 6시 5분, 가족들이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 현관등의 엷은 빛이 밤과 아침이 비밀스럽게 만나는 어둠을 살포시 갈라낸다. 코끝이 살짝 시린 온도 때문에 주위는 더욱 고요하고 어둠은 풀어지지 않을 것처럼 짙어 보인다. 넓은 도로에 가끔 보이는 자동차의 미등,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휴대폰 불빛, 건너는 이 없는 횡단보도에 혼자 바쁘게 깜빡이는 신호등. 빛보다 어둠이 더 많아 길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간, 곳곳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따라서 새벽 수영을 간다.
구름도 잘 없는 맑은 가을 하늘과 다르게 유난히 마음이 소란스러운 가을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퇴사까지 하고 쉬는 시간을 만들었는데도 잘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과 성취로 소란을 다잡아 보려고, 해내면 정말 기쁠 것 같지만 생각만 해도 걱정이 앞서는 수영을 큰마음을 먹고 시작했다.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모르니 도전을 없던 일로 만드는 마음이 커지기 전에 수영장에 도착하자마자 강습비를 결제했다. 건네받은 영수증이 도전이 시작되었다고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었지만, 카운터에서도 진동하는 습한 물 냄새에 괜히 마음이 초조해져 직원분께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제가 수영은 정말 처음인데, 수업을 잘 들을 수 있을까요?” “아, 수영 잘하는 분들은 다른 데 가세요, 여기는 다 초보분들이 다니세요.” 직원분이 바로 옆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레인 4개짜리 미니 수영장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초등학생들이 알록달록한 킥판을 들고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아담한 키즈 수영장이 내가 시작하기 딱 좋은 수준이겠구나 싶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작은 수영장 크기에 안심할 땐 언제고 나중에는 더 큰 수영장에서 멋지게 자유형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욕심이 커져서 조금 더 비싼 값을 주고 가슴팍에 나이키 로고가 있는 수영복을 샀다. 수영복에서 스포츠 선수 아우라가 가득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뭐든 잘 배우고 빨리 습득하는 편이니까, 나이키 수영복까지 입었으니까, 수영을 아주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나는 물에 뜨지 못하는 몸이었다. 같은 시기에 등록한 다른 수강생들이 매번 진도를 나가는 동안 자꾸만 뒤쳐져 수업 4일 차 만에 마지막 순서로 레인을 돌게 되었다. 열등생이 된 기분이 너무 오랜만이라 마음으로 먹먹한 울음을 삼키고 있었는데, 꼭 한 번씩 귀에 물이 들어가 귀까지 먹먹한 채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처음 귀에 물이 찼을 때는 낯선 감각이라 불안이 쉽게 번졌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물을 먹고 허우적거릴 때도 느끼지 않았던 두려움이 밀려왔다. 청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작은 소리를 잘 못 듣기도 하고, 주변 상황에 관심이 많아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엄청 집중해 소리를 듣는 습관이 있었다. 몸도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데 강사님 목소리까지 잘 들리지 않아 더욱 답답한 데다 중이염에 걸렸다는 수영 초보 후기가 떠올랐다. 혹시 하는 걱정이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머릿속을 비웠다. 지금 이 먹먹함은 얼굴을 물에 푹 담글 때 느껴지는 고요함을 물 밖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노이즈 캔슬링일 뿐이다. 집중을 위한 장치다. 수영을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준다. 도전할 때는 긍정 회로가 꼭 필요하니까, 그렇게 매번 귓속이 먹먹하면 그런대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수업이 끝나고 물 밖으로 나와 한 발로 뛰면서 세차게 해드뱅잉을 하고 나면 마침내 맑고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날은 귀에 물이 빠지고 정말 개운했는지 기쁜 마음에 이빨이 다 드러나는 미소를 지었다. 들리지 않아도 괜찮지만, 들렸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랐던 초조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혼자만의 머쓱함에 서둘러 웃음을 숨겼다.
물을 마주할 때면 내가 어떻게 지냈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자주 부끄러웠다.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힘을 빼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사님 말로는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겨야 하는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리에 힘을 주고, 등허리에 힘을 주어 자꾸만 가라앉는 것이라고 했다. 친절한 강사님은 내가 물에 대한 겁이 많아 그런 거라며 기를 살려주려고 응원해 주셨지만,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물에 빠지면 그냥 빠지는 거로 생각하는 내게 그 말은 긍정 회로마저 일시정지하게 되는 그냥 내가 몸치라는 확인 사살로 돌아올 뿐이었다….
머리와 몸이 성공적으로 협응하는 일도 어렵고 힘을 주는 것보다 빼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수영을 통해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경험해 본 운동은 헬스, 필라테스 뿐인데 둘 다 힘을 주는 운동이라 힘 빼기를 잘 못한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말 그대로 변명이다…. 어떤 운동이든 잘하려면 힘을 주어야 할 곳에 잘 주고 나머지 부분에는 힘을 빼야 하는데, 방법을 몰라 불필요한 힘을 너무 많이 주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힘을 주어서 영법을 구사하지 못하고 물만 잔뜩 먹고 레인 한 가운데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도 운동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몸은 생각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돌발상황에 넘어질까 봐 두 발을 지면에 꾹 눌러 붙이고, 잘하고 싶고 실수하고 싶지 않아 어깨에 힘을 준 채로 긴장을 놓지 못했다. 위축되어 보이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하게 펴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세우고 상황에 맞춰 움직일 준비를 했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하고 싶어서 힘을 밖으로 뻗어내는 데 급했고, 나를 지탱해 줄 가장 깊숙한 코어에는 힘을 모으지 못했다.
그런데 물에서는 내 습관이 전부 반대로 바뀌어야 했다. 몸 가장 안쪽 코어에 힘을 주고 팔다리에 힘을 빼고, 물을 경계하지 말고, 나를 자연스럽게 맡겨야 한다. 눈과 귀는 물의 품으로 스며 들어가게 내버려 둔다. 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수영에 필요한 자세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너무나 바라던 삶의 태도 그대로였다. 몸도 마음도 경직되고 고장 난 나에게 내 의지로 처방한 퇴사라는 쉬는 시간에 단지 먼 훗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한 생존 수영을 배우려고 했는데, 수영은 물 밖에서도 날마다 나를 살려내고 있었다.
유연하게, 고요하게 지내고 싶다.
때로는 무엇이든 믿고 몸을 맡기고 싶다.
물살처럼 보드랍게 퍼져나가고 싶다.
1년여 동안 퇴사를 두 번 경험하며 어떤 날은 퇴사를 선택한 용기를 칭찬하다가도 상황을 버티지 못한 내 모습을 미워했다. 환경이 힘들다고 힘을 꽉 주고 맞설 게 아니라 힘을 풀었다면 어땠을까. 너무 잘하고 싶어 더욱 힘을 주다가 지쳐버리고, 몸에 이어 생각까지 뻣뻣해져 더 이상 좋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던 게 아닐까. 물속에서 팔을 돌릴 때 부드럽게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물결처럼 외부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면 덜 괴로웠을까. 수영을 마치고 나와 어둠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영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걸음마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물에서 뜰 듯 말 듯 한 기분을 자주 떠올린다.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지고, 버둥대며 발을 차면 가라앉는 순간을 몸에 새긴다. 마지막 출발 주자여도, 주변 소음은 신경 쓰지 않고도, 어떻게든 충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물속 감각을 되짚는다.
이따금 마음이 소란스러운 날에는 귀를 접어 물속에서 느낀 먹먹함과 고요함을 재현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물 밖에서도 물속에서처럼 고요하게 노이즈캔슬링을 한다. 힘을 잘 주는 내가 힘을 잘 빼는 나와 같이 인생에 찾아올 다른 파도를 헤엄쳐 갈 수 있도록, 수영을 배우며 다시 어느 나날을 잘 지내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