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0 0 4에게
안녕, 잘 지내고 있어?
우리 마지막으로 본 게 여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흘러버린 것 같아. 무려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가 마지막이었어. 늦어서 미안해.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하면 성의없는 핑계가 될까? 모두가 바쁘고 치열한 시간을 건너왔으니까. 그러다보니 어느덧 눈이 내리는 계절이 왔네. 하지만 뜨거운 아스팔트와 미지근한 바다, 초록, 녹음, 푸른 그런 단어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여름의 숲을 기억해? 다 지나버린 시절을 오래 곱씹고 마는건 사람이 가진 습성인 걸까. 지나버린 건 늘 반짝이고 말이야. 올해 여름이 유독 그랬던 것 같아. 이젠 저녁 6시가 되면 세상이 온통 캄캄해지고 밤을 헤집으며 퇴근하는 기분이야. 사나운 바람에 몸을 웅크린 채 손에 든 핸드폰 불빛을 보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별들이 각자의 궤도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해.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내 안부를 적어볼까.
나는 잘 지냈어. 물론 모두가 그렇듯 아주 좋은 날도 있었고, 아주 나쁜 날도 있었지. 그래도 어림잡아 평균을 내보자면, 내 지난날들은 좋았던 것 같아. 하루를 여덟 조각으로 쪼갠 것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던 날도 있었고, 하루를 잘 녹지 않는 사탕처럼 오래오래 입에 머금고 있던 날도 있었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걱정하고, 화내고, 슬프고, 삭히고. 그러다 오래된 사람들을 만나면 편해졌어. 오랫동안 사용한 나무 책상처럼 서로가 서로의 손에 닳아, 손 기름이 묻어 다칠 일 없는 그런 사이, 그런 사람들 말이야.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그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사는 게 괜찮아지더라. 마주친 까만 눈동자에서 데굴데굴, 다정함이 굴러다녔어. 그 다정함을 기억했다가 힘이 들 때 다시 보고 웃었어. 밤에는 걱정과 불안이 자주 들렀는데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이야길 자꾸 하더라. 그래서 그 말이 싫어서 더 바쁘게 지내기도 했어. 몸이 지치면 감정도 무뎌지니까, 일부러 나를 힘들게 했어. 너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을까. 오랜만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
사실 고백하자면 세상을 좀 멀리했어.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있었어. 내가 길이라고 믿던 곳에서 벗어나야 했고, 모든 기준을 다시 세워야 했거든.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계속 잘못된 길을 걷는 느낌이었어. 자주 뒤를 돌아보고 발걸음을 떼지 못했어. 어쩌면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날들도 내 착각이었을지 모르지. 일기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 멈추고 SNS를 하지 않게 됐어. 세상에 팔리는, 혹은 쓸모 있는 무언가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아졌어. 그 안엔 글도 있어서,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내가 쓴 글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오래 했어. 내가 뭐라고. 그치? 이건 유난히 날이 좋았던 9월의 이야기.
사실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야. 좋은 일도 많았고 남들이 보기엔 배가 불렀다고 생각할 만한 일들도 많았어. 어쩌면 그래서 더 불안했던 것 같아. 그 어떤 일도 내가 예상한 것이 없었거든. 세상이라는 아주 거대한 흐름에서 나는 아주 작은 파도 포말이고, 나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흘러가야했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렇게 정말 필요한 일만 하며 지내다가, 문득 내가 쓴 글들이 보고싶었어. 욱림솔훈에 썼던 글들, 학교를 다니며 만들었던 책들, 기고한 글들. 가장 보기 쉬웠던 건 욱림솔훈 메일링으로 썼던 글이었고, 몇 편을 읽다가 (다시 고치고 싶은 글들이 많았지만)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일을 끝내고 들어와 몸이 아주 피곤한 날이었는데도 두세 시간쯤 책상에 앉아있었던 것 같아. 그때 알았어. 쓸모가 없어도, 이유가 없어도 쓰고 싶은 마음이 아직 나에게 남아있다는걸. 그날 쓴 글은 시이자 에세이이자 소설이었고, 누군가에게 보여줄만큼 좋지 않았지만 내가 다시 글을 쓰게 하는 글이 되었어. 나에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 어떤 위로와 응원도 내가 나를 제대로 만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보다 힘이 될 수 없더라. 너에게도 보여줄 수 없지만 그런 일을 겪었다고는 말하고 싶었어. 너는 날 기다릴 것 같아서. 그래서 염치없지만, 실없기도 하지만 다시 써보기로 했어.
이게 내 지난 3개월에 대한 이야기야. 싱겁고 평범했어. 잘 지냈다고 해놓고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했나 싶기도 해. 하지만 이런 날들도 다 더해서 나누면, 결국 좋았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더라. 영원한 슬픔도, 영원한 기쁨도 없기 때문에 늘 그 중간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나는 그날의 오랜 글쓰기 끝에 나와 합의했어. 그리고 그 중간값은 늘 좋다에 범주에 머물거라고 믿으려 해. 니체가 말했듯 우린 망각의 동물이니까. 잊을 수 있는 슬픔과 수치와 고통이라면 잊는게 좋다고, 기꺼이 잊자고 말했어. 다르게 말하면 언제나 완벽한 나와 언제나 별로인 나는 각자 영원하지 않으므로 그 중간값인 '좋은 유림'으로 살자고. 그렇게 '좋은 유림'은 볕이 좋은 날에 공원을 걸었고, 여름을 누리러 바다로 달려가기도 했어. 어느 가을엔 하루가 끝나기 전에 친구들을 만나 이국의 음식을 먹으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했어. 내 미래를 조금만 들춰보자면 이번 겨울엔 여행 계획이 하나 잡혀있고 시를 몇 편 완성할 생각이야. 너에게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3개월 동안 너는 어땠는지 궁금해.
바람이 점점 매서워지는 동안, 기쁘고 슬픈 일들이 얼마나 네 하루를 스쳐 갔는지. 너도 그 나날들의 평균을 냈을 때 좋았다고 할 수 있는 날들이었는지. 너의 쓸모를 자꾸 찾게 되는 씁쓸한 날이 있었는지, 완벽한 너와 별로인 너 사이에서 오래 스스로를 질책하지는 않는지, 그 날 뒤엔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날들이 기꺼이 따라왔는지, 쓸모와 이유를 넘어서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지, 혹은 찾고 있는지. 만약 헤메고 있다면 그때 오늘 읽은 이 글이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분명 너도 너의 날들도 좋음의 범주에서 멀지 않을테니, 좋은 1 0 0 4아. 염치없지만 답장을 기다려도 될까?
두서없는 문장이어도 좋아.
이번엔 내가 기다릴게.
네가 날 기다려 준것처럼.
빈 계절에 전하지 못한 안부를 담아_ 유림 |